전체상품목록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현재 위치
  1. 게시판
  2. 현악기

현악기

현악기 자료실 입니다.

게시판 상세
제목 바이올린 역사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05-05-30
  • 추천 추천하기
  • 조회수 29264

 1) 바이올린 역사

    

 

물리적인 음향 법칙으로 보거나 형태적인 완전성으로 보거나
바이올린만큼 완벽한 악기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외부의 곡선 하나에도 음향 원리가 반영되어 있으며 길이와 두께,
휘어진 각도까지도 이유 없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바로 바이올린이다.

바이올린이 이와 같은 원리와 모습을 갖게 된 것이
누구의 손에 의해서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악기 앞면에 있는 f자 울림구멍이 프란츠(Frantz)를
암시하고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으며,
프랑스의 황제 프랑시스 1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바이올린의 발명자로 지목한 일이 있으나
이 역시 정론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무수히 많았던 비올 제작자들 중에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가졌던 몇몇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시도를 통해 바이올린의 토대를 만들고,
어느 한 명인의 손에 의해 체계화되어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대부분의 바이올린 명기들이
크레모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3세기 초까지는 이탈리아인들은 활을 사용하는
악기를 알고 있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류트나 기타를 만들었고 이 방면에서
높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들은 13세기를 보내면서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활을 사용하는 악기의 제작방법을 배웠고,
이 방법이 그들의 기술과 만나게 되어 훌륭한 비올 작품들을 만들게 된다.

그러다가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돌연 바이올린이 볼로냐 화가의 그림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줄리오 노마노가 1550년에 그린 그림이나 페레그리노 티발디의
그림 ‘성 세실리아와 바이올린을 켜는 두 천사’ 속에 바이올린이 등장한다.

이것을 근거로 최초의 바이올린은 16세기의 30년대나
40년대의 볼로냐에서 태어났다고 추측된다.

바이올린의 역사를 찾기 위해 이전에 존재했었던
모든 현악기를 바이올린의 전신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어떤 악기들은 점진적으로 바이올린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령 페르시아의 케멘체나 아라비아의 르바브, 무어인들의 레벡,
켈트인들의 크루트, 독일의 트룸샤이트, 프랑스의 비엘 등이 그 예이다.

한편 바이올린을 포함한 현악기의 계통을 그리스의
기타라에서 찾는 견해도 있는데, 손으로 퉁겨 연주하던 기타라가
중세 전기에 이르러 손으로 퉁기기도 하고 활로 문지르기도 하는
로타로 발전하고, 이 로타가 12∼13세기의 비엘로 발전하며
비엘이 15세기를 거치며 비올이 된다는 것이다.

비올은 바이올린처럼 허리가 잘룩한 모양을 갖게 되고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 비올족의 악기들은 바이올린이 탄생한 이후에도
한동안 공존했으며 17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비올이 바이올린과 다른 점은 현의 수가 6개이며, 무릎 위나
무릎 사이에 끼우고 연주한다는 점이다.
비올에서 바이올린이 나오는 중간 과정에 리라 다 브라치오라는
악기가 나타나 무릎 위에서 연주하던 방식을 어깨에 올리고
연주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역할을 맡는다.

비올과 리라와의 차이는 비올의 울림구멍은 C자인 데 반해
리라 다 브라치오의 울림구멍은 f자라는 점이다.

16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오늘날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정착한 바이올린은 그 이후 이탈리아의 크레모나와 브레시아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의 유명한 제작자로는 안드레아 아마티와 그의 손자
니콜라우스 아마티, 니콜라우스의 제자 안토니우스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가문의 안드레아와 안토니오 델 제수, 그리고 루제리, 베르곤치,
몬타냐나, 스토리오니 등이 있으며 그란치노와 과다니니는 밀라노에서,
갈리아노는 베네치아에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안토니우스 스트라디바리가 그 가문 특유의
악기 몸통 모양을 창출한 이후 그것이 표준형으로 고정되어
1700년대부터는 바이올린의 몸통이 35.5cm로 커졌다.

당시의 유명한 제작자들은 목의 후면 경사를 높이고
굵은 현을 강하게 조여 사용했으며, 브리지를
높게 올리고 지판의 길이를 늘렸다.

이렇게 하여 보다 풍부한 음량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음향적인 면에서도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제작된 악기들은 따라갈 수 없는 이상적인 악기로
지금까지도 인정받고 있다.

한편 바이올린의 활도 상당 기간을 통해 오늘의 모습으로 정착한다.
최초의 활은 화살을 쏘는 활의 모습과 같이 반원형으로 되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활의 탄력이 턱없이 부족하며
충분한 길이를 확보하기도 어렵다.

16세기 초에 활털과 막대 사이에 간격을 두어 잡기 좋게 만든 활이 나왔고,
17세기 초에는 활대의 구부러진 정도가 훨씬 적어졌다.

17세기 말엽에 이르러 금속 고리를 걸어 활털 이음틀을 움직여서
활털의 장력을 바꿀 수 있는 장치가 고안되었다.

18세기 초에는 나사로 움직이는 활털 이음틀의 원리가 고안되었으며
활대의 각도도 더욱 줄어들었다.
18세기 중엽 타르티니의 영향으로 활대가 직선으로 정착되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활을 만들었던 투르트는 바이올린에서 스트라디바리가
이룬 업적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활 제작 부문에서 남겼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프랑스의 활이 상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며, 골동품 활을 수집하는 상인이
유럽 여러 나라 중에서도 유독 프랑스에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첨부파일
비밀번호 수정 및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댓글 수정

비밀번호 :

/ byte

비밀번호 : 확인 취소



     

    전국 85개지점 대표번호

    은행계좌안내

    • 예금주